인문학에 기반한 투자 철학/인문학 공부

[최태성] 역사 앞에 선다는 것

NASH INVESTMENT 2018. 3. 22.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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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도에 대학에 입학을 하였는데

그때는 1987년 민주화 운동의 여진이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여전히 시위가 지속되었고, 과격했습니다.

자신은 고등학교 때 어떤 생활을 했냐면

아무 색깔없는 완전 범생이였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TV와 뉴스로 위의 민주화운동,

최루탄과 화염병 던지고 경찰서 불나는 장면

을 보고 시위하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완전 범생이 학생이

이제 대학교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대학교는 전국에서도

시위 잘하기로 유명한 학교였다고 합니다.

자신이 과방에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사람들이 꽉 차 있었고,

'투쟁!, 투쟁!'을 외치면서

자신에게 시위 노래를 같이 부르자고 하였고

그때 정말 무서웠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때 TV로 보았던 나쁜 사람들이

꽉 차있었던 것이죠.

정말 무서워서 학교도

 가기 싫을 정도였다고 하네요.

하지만 학교를 그만둘 수는 없었고

어쩔 수 없이 그들과 같이 수업도 듣고

어쩔 수 없이 밥도 같이 먹고

어쩔 수 없이 술도 한잔 하게 되었고

그러다가 그들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을 통해서

6월 민주화 항쟁의 또 다른 모습을 알게 되었고

5.18. 광주의 아픔을 비디오로 처음 봤다고 합니다.

보는 내내 너무 가슴이 아팠지만

그들과 함께 할 수는 없었다고 하네요.

친구들을 시위를 하다가 경찰서에 끌려가

감옥에 들어갔다고 들어도, 자신은 중앙도서관에 앉아

영어책을 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때 참 불편함을 느꼈고

처음으로 역사 앞에 서보게 되었다고 하네요.

친구들이 끌려가는 상황 속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되지?

나 어떻게 살아야 되지?라는 고민을

처음 해보게 된 그 순간이

바로 그 때 였다고 합니다.

그래도 그들과 함께 할 수는 없었고

그 이유는 자신의 집은 양복집을 하다가

다 말아 먹고 복덕방에 책상 갖다 놓고

겨우겨우 연명하는 집안이었고 살아야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함께 있다가 감옥이라도 가게 되면 큰일이 나기 때문이죠.

그때 나름대로 역사 앞에서 약속을 하였는데

어떻게 보면 도피처고 어떻게 보면 자기 합리화인데

'태성아, 일단 지금은 공부하자.

나중에 안정적 직업을 얻고 그때 가서 지금 하지 못하는

 우리에 대한 고민을 그때 하자.

넌 여기 앉아 있어야 될 것 같다.'

그렇게 자신의 대학생활이 흘러갔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이 교사가 되었고

분필을 잡고 한국사를 알리게 되었다고 하네요.

그런데도 교사 생활을 하면서

매일매일이 불편하였고

대학교 때 역사라는 거울 앞에서 나가 내 스스로에게 약속했던 것을

나는 하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짓눌렀다고 합니다.

문득 누구랑 비교해서 내가 잘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갖고 있는 능력 중 내가 잘하는 것

역사 잘 만들어서 알려주는 것

그렇게 해서 우리를 위해

무언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 다짐을 하였다고 합니다.

EBS에서 무료 강의를 시작하였고

누적 수강생이 5백만 명이 넘는다고 하네요.

숫자에 연연하는 것은 아니고

양질의 한국사를 무료 강의를 통해서

나 역시 우리의 사회의 건강한 시민들을

하나씩 하나씩 만들어 나가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대학교 때 역사 앞에 섰을 때 괴로움을 갚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다짐을 하고  지금도,

앞으로도 무료 강의를 할 것이라고 합니다.

정말 대단한 분들은 늘 역사 앞에 써왔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다산 정약용 선생님이라고 하네요.

다산 정약용의 멘토는 바로 정조라고 합니다.

정약용의 운명은 바로 멘토인 정조와

함께 끝나게 된다고 합니다.

정조가 1800년에 갑자기 승하를 하였고

정약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어

죄인이 되어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고 하네요.

유배생활을 얼마 정도 했을까요?

무려 18년이라고 하네요.

놀라운 사실은 이 18년 동안

정약용이 책을 만드는데

무려 500여 권 이상의 책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책을 써보아서 아는데

1년에 책 한 권 쓰는 것은

엄청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하네요.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만 그는 18년 동안

18권도 아닌 500여 권의 책을 써냈고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유를 그의 아들에게 편지를 통해서 밝혔는데

그 내용을 알면 정말 소름이 돋는다고 하네요.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나는 폐족이다.

아들아 우리 집안이 비록 망하였지만

이어나가려면 우리의 흔적을 남기려면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학문을 통해서 남겨야 된다.'

무슨 말일까요?

정약용이라는 사람이 18년 유배 생활 동안에

그 많은 기록을 썼던 이유는,

내가 만약 이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면

역사 앞에서 나는 어떻게 평가될지를

끊임없이 고민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내가 만약 이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면

형조에 몇 줄짜리 죄인으로

남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시대의 고민, 변화를 위해서

고민했던 정약용으로 남고 싶었던 것이지요.

역사 앞에서 약속했던 것입니다.

죄인 정약용이 아닌,

개혁자 사상가 정약용으로 남기 위해서

그는 그의 흔적, 몸짓을 500여 권의 책에 남기고 또 남겼던 것이지요.

역사 앞에 선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라고 합니다.

정약용은 정확하게 역사가 무엇인지,

역사가 나를 어떻게 기억해줄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역사의 거울 앞에서 물어보고

또 물어봤다고 합니다.

정약용은 현재 실학의 집대성, 사상가, 개혁가로

정확하게 우리에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혹시 우리의 외교권을 강탈당했던 사건이 뭘까요?

바로 '을사늑약'이라고 합니다.

이 을사늑약을 도와줬던 을사 5적이 있는데

여러분들은 외교권을 팔아치운 이 을사 5적을

기억하고 있으리라고 믿고 있다고 합니다.

'이완용, 이근택, 박제순, 권중현, 이지용'

자신은 수업시간에

이런 얘기를 많이 한다고 하네요.

"얘들아, 우리나라 팔아먹는 데 앞장섰던

다섯 명들 이 교실에서 이 안에서 내가 이름을

 부를 테니 마음껏 욕 한 번 해봐라!"

그러면 학생들은 서서히 욕을 하기 시작하고

그때 자신은 이렇게 얘기를 한다고 합니다.

"너희들이 신나게 웃고 떠들었던 이 순간을

반드시 기억해라!

역사 문제 다 잊어도 되지만

욕을 했던 이 장면을 꼭 기억해라!

 너희들은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

 너희들도 언젠가는 선택해야 될

책임을 져야 될 그 순간이 올 것이다.

그 때 수업시간에 했던

 너희들의 모습을 기억해라!

여기 있는 을사 5적은 죽었지만 죽지 못하지 않니?

역사시간마다 끊임없이 일으켜 세우면서

역사의 단죄를 내리는 너희들의 모습을 기억해라!

너희들이 역사 앞에서 어떤 선택을

내려야 되는지 잊어서는 안 된다."

을사늑약을 체결했던 이 을사 5적들은 역사 앞에서 자신의

 모습들을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우리 시대는 어떨까요?

우리들은 역사 앞에 서 본 경험이 있을까요?

자신은 역사 앞에 서 있었던 인물과

서 있지 않은 인물의 결과는 너무나도 다르다고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정약용은 그 당시 죄인이었지만

지금은 대단한 사상가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을사 5적들은 그 당시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역사의 죄인으로 남아 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역사 앞에 서 있기를 바라며

세상을 바꾸는 시간은 역사 앞에서

서 있는 시간이라고 하며 강의를 마치셨습니다.

 

정말 역사에 무지한 제 자신을 반성하게 되는 강의였습니다.

역사를 잊은 사람은 현재도 미래도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행복한 시간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역사의 위대한 인물들이

자신을 희생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의 나라는 망하기 마련입니다.

우리들도 현재 바쁜 생활을 살고 있지만

우리의 역사를 천천히 알아가 진정한

우리의 역사를 되새기며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참고를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상 포스팅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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