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 루토] 창의성은 두뇌가 가장 두려워하는 환경에서 성장합니다

2022. 2. 26. 23:09부자에 대한 공부/성공한 부자들의 인사이트

반응형

 

창의성은 두뇌가 가장 두려워하는 환경에서 성장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들은 불확실성을 줄이고

확실성을 늘리기 위함입니다.

배를 타고 갈 때 선체의 상하 움직임에 따라 시야도

함께 움직이잖아요?

이때 눈은 우리에게 '우린 정지상태야'라고 말하지만

귓속 전정기관은 '아니야 이동 중이야.'

우리의 두뇌는 이러한 충돌을 견디지 못하므로 멀미를 앓습니다.

불확실성으로 인한 스트레스 우리 사회에 상당히

만연한 이 스트레스는 뇌세포를 죽이고 뇌가소성을 저하시키며

과민반응을 유도합니다.

불확실성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가능한 모든 행동을 취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곳 말고는 갈 곳이 없습니다.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기 위해서는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창의성, 즉 다르게 볼 수 있는 능력의 확보는

항상 동일한 출발점에서 비롯됩니다.

질문.

앎의 부재.

왜?

만약?

에서요.

또 한 가지 말씀드려야 할 것은 이 머릿속에 전제들이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한 걸음을 걸을 때조차 두뇌는 수백 가지 전제들을 설정합니다.

땅바닥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다리에 힘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저것은 구멍이 아니고 표면이다 등등이죠.

이 전제들은 우리의 생존에 필수적이지만 동시에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기존엔 유효했던 전제들이 지금은 그렇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두뇌는 진화하도록 진화되어 왔으며 적응하도록

적응되어 왔습니다.

따라서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세상을 다르게 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의 모든 인지가 평생 세워온 전제들에서 비롯된다면?'

우리 머릿속 전제들과 인지의 형성과정은 우리의

속박과 해방 이 두 가지의 열쇠를 전부 쥐고 있습니다.

우리의 두뇌가 의미 없는 무언가에 의미를 부여하도록

진화되어왔기 때문입니다.

무언가가 보였을 때 그것이 포식자인지 아닌지

머뭇거린다면 이미 늦습니다.

그래서 두뇌는 의미 없는 정보에 의미를 부여하도록

진화해왔고 그것이 바로 인지의 형성 과정입니다.

그렇게 세워온 전제들을 우리는 움켜쥐고 두뇌에 각인시키지요.

그렇게 고정관념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가?

바로 인지의 과정을 공략함으로써 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가장 첫 단계는 인정하는

수준을 넘어 내재화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의 모든 행동들이 당신이 쌓아온 전제들에

기반되어 있다는 사실이요.

항상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당신이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차단되기 때문입니다.

이 영상을 통해 무언가를 하나라도 얻어갈 수 있다면

'인지의 과정'을 배워갔으면 좋겠고 영상을 보기 전에

비해 아는 것이 줄어든 것처럼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흥미로운 일들은 항상 아는 상태가 아닌

모르는 상태에서 출발하기 때문이고 그다음 단계가

무의식적으로 세워온 전제들을 발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하는 행동들을 왜 하는지 알지 못하니까요.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그 전제들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제들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전제들에 대한 의문 제기 즉, 자신이 이미 진리로

여기던 생각들에 의혹을 표하는 것은 특히 그 전제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을 경우 우리 두뇌가

피하도록 진화해온 그것에 정면으로 뛰어드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불확싱설'에요.

실제로 불확실성은 워낙 어렵고 위험하기 때문에 두뇌는

그것을 아예 피하도록 진화해왔습니다.

그 결과 생겨난 것들 중 하나가 '확증 편향'입니다.

자신이 이미 진리로 여기던 것들을 뒷받침하는 정보들을

찾고 반대는 정보들은 무시하는 경향 말이죠.

우리는 차라리 현실에서 통하지 않는 기존 전제들에

머물러 있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더 안전한 것처럼 느껴지니까요.

그 전제들에 의문을 제기하고 미지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보다 말이죠.

설령 그곳이 지금 이곳보다 훨씬 더 좋은 곳일지라도요.

이것은 정치적 주제에서 흔히 보이는 모습이고

우리가 의견 번복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어느 정치인이 새로운 사실을 접한 뒤 기존 입장을

번복할 경우 우리는 그를 조롱합니다.

우리는 그가 무조건 기존 입장을 고수하길 기대하죠.

새로운 사실과 상관없이요.

신앙적 확신을 가질 것을 기대합니다.

사실적 근거에 입각한 입장이 아니라요.

이즈음에서 궁금해지는 것은 과연 우리의 두뇌가 한 번에

큰 도약을 할 수 있는지 아니면 매 순간 조금씩만

바뀌는지 인데요.

정답부터 말씀드리자면 두뇌는 매 순간 조금씩만 바뀝니다.

제가 여기에서 방 반대편까지 이동하려면 그 사이의

공간을 지나쳐야 합니다.

순간이동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두뇌 속 전제들도 매번 조금씩만 바뀝니다.

다시 말해 특정 순간 두뇌는 가장 가능성 높은 다음 상태로만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가장 가능성 높은 다음 상태를 결정짓는 것은

현시점의 전제들이고 이것을 '가능성 공간'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행동이든 다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취할 수 없는 행동들이 존재합니다.

본인이 세상을 어떻게 인지하는지 어떤 관념들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서요.

어떤 행동이 가능한지는 어떤 전제를 쌓아놨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이 창의성과 어떤 상관이 있는가

창의성은 두 가지의 서로 거리가 먼 두 개념을

연결시키는 능력을 가리키는데 두뇌가 커다란 도약을

할 수 없다는 게 사실이라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그에 대한 대답은 창의적인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들은 단지 현 상태를 기준으로 가장 가능성 높은

다음 상태로 살짝 이동했을 뿐인 겁니다.

그들이 쌓아온 전제들에 기반해서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우와 어떻게

저렁게 거리가 먼 두 개념들을 연결시키지?' 하며

감탄합니다.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보는 사람들 관점에서는

그 둘의 거리가 실제로 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가능성 공간'은 창의성 있는 사람과 다르고

그들의 공간에서 두 개념들은 엄청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렇듯 창의적인 것은 외부에서의 관점일 뿐 정작 본인은

그렇게 느끼지 않습니다.

정작 창의적인 사람 본인은 논리적 판단에 따른 다음 행동을

하고 있는 것뿐이죠.

'가능성 공간'이 다른 겁니다.

남들과 다른 전제, 남들과 다른 편향, 그들의 가능성 공간은

남들보다 더 복잡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편향 그리고 전제들 자체가 더 복잡하니까요.

가령 남들보다 개방된 성향을 바탕으로 새롭게 접한

문화들 안의 복잡한 전제들을 잘 흡수, 융합해왔을 수 있겠죠.

그래서 이들의 가능성 공간에는 남들보다 다양한

동선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서로 거리가 먼 것을 이을 수 있는

창의력이라고 해석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논리적 사고 절차

에 따른 것으로 여러 번의 작은 상태 변화들을 통해

가능성 공간을 변형시킨 결과입니다.

무의식적으로 설정해온 전제들을 포착하고 그것들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 후로 말이죠.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