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8. 21. 14:47ㆍ부자에 대한 공부/성공한 부자들의 인사이트
LVMH 그룹은 디올, 루이뷔통, 지방시, 로에베 같은
명품 브랜드부터 모엣 샹동, 돔페리뇽, 크룩, 헤네시 같은 주류 등
총 75개의 브랜드를 가지고 있는 시총 500조의 회사임.
수장 베르나르 아르노는 이 75개 브랜드 중 하나도 만들지 않음.
어떻게 75개 브랜드를 모았을까?
출발은 크리스천 디올.
디올은 1920~30년대 코코 샤넬과 함께 파리 패션의 부흥을 이끌었음.
그런데 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 지배하에 놓이게 됨.
히틀러는 통이 넓은 유니폼을 제작하도록 강요함.
1946년 전쟁 지후 디올은 다행히 과거 디자인을 찾았음.
디올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브랜드를 내려고
마셀 부 삭이라는 기업가에게 접근함.
1947년 2월, 디올은 첫 컬렉션을 보여주는데 패션 시장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음.
전쟁이 끝난지 2년밖에 안되었는데 디올은
아주 럭셔리하고 부드럽고 비싼 재료들로 귀족들에게 보여줌.
패션 업계에서는 인생의 풍요를 다시 보여주었다는 평과
일반 시민들은 비싼 옷은 낭비다! 라며 데모를 했음.
1949년 파리 패션 수출의 75%가 디올의 옷이었고
프랑스 국가 전체 수출의 5%를 차지했음.
그리고 1950년대 디올이라는 라이선스를 파는 시도를 함.
* 오늘날의 프랜차이즈 비즈니스와 비슷.
그런데 엄청난 질타를 받음.(헤리티지 손상)
하지만 브랜드 가치와는 별개로 돈 복사하는 기계가 되어버림.
미국에서 엄청 팔려서 타임지에도 실리기 시작함.
1957년 하반기 악재가 터짐.
디올의 사망.
디올이 없는 디올.
21살짜리 어시스트턴트에게 경영을 맡기는데
그 이름이 '입생로랑'.(근대화의 아이콘)
보수적인 마셀 부식은 입생로랑의 디자인이
너무 급진적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1960년에 해고해 버림.
디올은 나락의 길을 걷고 입생로랑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성공함.
1978년 마셀 부산 그룹은 파산 신청을 하는데 역사상 가장 컸음.
이 회사를 사줄 회사가 없어서 프랑스 정부가 운영했음.
그런데 베르나르 아르노가 등장함.
아르노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고 회사 경영에 배해 배웠음.
그런데 '경영 수업'을 택하지 않았음.
프랑스에 수능처럼 시험을 쳐서 대학교를 갔음.(들어가기 힘듦)
대학 재학기간 중 1971년 그는 뉴욕으로 여행을 떠남.
공항에서 내려서 택시를 탔는데 기사가 어디서 왔냐고 물어봄.
프랑스에서 왔다고 하자 프랑스를 좋아한다고 함.
그런데 대통령보다 '디올'이라는 브랜드를 안다고 함.
베르나르 아르노는 뉴욕에서 이야기 후 '디올'이라는 브랜드가
프랑스의 에펠탑이나 루브르 박물관처럼 브랜드 파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됨.
대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 회사를 물려받고 부동산 회사로 바꿔버림.
토목, 건설 부문을 매각하고 부동산 투자를 했는데 성공적이었음.
그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감.
플로리다 팜 비치에서 콘도를 짓는 사업을 하였는데
잘되지 않아 뉴욕으로 갔고 엄청난 행운이 일어남.
자기 집 옆에 존 클루지라는 자산가가 살았는데
월가 출신 금융맨이었고 'LBO(Leverage Buyout)' 전문가였음.
적은 자금으로 회사를 사는 방법인데 인수 대상이 되는
회사의 자산을 담보로 잡고 기업 인수에 필요한 자금을 빌려서 인수하는 방법임.
인수 후 불필요한 사업을 잘라내고 잘되는 사업 부분을 키워서 수익을 냄.
아르노는 미국식 'LBO'와 '효율적 경영'에 관심을 느낌.
프랑스에 비효율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회사를 사서 키워보고자 함.
그리고 '디올'이 포함되어 있는 부산 그룹.
인수한다면 디올과 봉마쉐라는 백화점을 제외한 다른
사업 부분을 다 팔고 두 사업부에 집중할 생각이었음.
투자은행인 '라자드'와 좋은 비즈니스 관계를 유지한 터라 'LBO용 대출'을 해줌.
아르노는 디올 브랜드를 키우는데만 집중을 함.
충성도, 럭셔리 브랜드 특유의 마진에 놀라버림.
5년 안에 기업가치는 3조를 돌파하고 매년 1,300억 원이 넘는 순이익을 냄.
그런데 어느 날 럭셔리 산업의 다크호스인 아르노에게 급한 연락이 옴.
루이비통을 진두지휘하던 헨리 라크미에였음.
루이비통은 1854년에 시작된 아주 오래된 브랜드임.
왕실용 여행용 가방을 만들었었음.
자영업자에 가까웠는데 '럭셔리 브랜드'라는 개념을 만듦.
1970년대 세계화의 물결을 보고 일반 사람도 럭셔리를 살 수 있다고 판단함.
그리고 도쿄, 오사카에 매장을 냄.
1984년에는 서울에도 냄.
창업후 125년 동안 매장 2개에 불과한 루이비통은 13년 만인 1990년까지
125개의 매장을 각국에 열었음.
매출은 150억 원에서 1,600억 원이 됨.(7년 만에 10배 성장)
그리고 1984년에 상장시킴.
그리고 모엣-헤네시의 대표에게 연락을 받음.
'미국의 기업 사냥꾼이 우리를 노리고 있다!'
모엣-헤네시는 모엣이라는 샴페인과 헤네시라는 코냑 브랜드를
인수합병하고 모엣-헤네시를 전 세계적인 주류 기업이 됨.
루이비통도 금융인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인수합병을 제안함.
지분이 51%를 넘게되어 외부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워짐.
결국 합병을 하고 몰아냄 > LVMH.(루비이통 & 모엣-헤네시)
그런데 서로 대표끼리 사이가 좋지 않았음.
사로 배신할 것을 걱정해 제삼자를 끌어들여 삼각 연합으로 소유하고자 함.
그리고 당시 LVMH보다 더 큰 기업인 '기네스'를 끌어들이고자 했음.
루이뷔통 입장에서는 거대 주류 기업들이 LVMH 그룹을
장악해버리지는 않을까 걱정함.
기네스는 LVMH 그룹의 3.5%를 사들이기로 합의했는데
대표가 돌연 20을 산다고 해버림.(선전포고나 다름없음.)
그래서 루이뷔통 대표는 럭셔리 제품을 만드는 회사를 연합군으로 데리고 오고자 함.
그때 디올 브랜드를 훌륭하게 성장시킨 아르노에게 제안함.(최악의 실수)
'라자드'는 루이비통보다 모엣-헤네시 + 기네스 편에 서는 것이
여러 측면에서 좋을 것이다라고 조언을 해줌.
아르노와 기네스는 60/40 합작 법인을 세워 2조 원을 조달하고
LVMH 지분 24%를 얻음.
7천억을 더 조달해서 지분을 추가 확보함.
'아르노'는 디올 지분 일부를 IPO 시켜서 자금을 조달한 것임.
그러자 모엣-헤네시와 루이비통이 동맹하여 맞서게 됨.
이때 전략적으로 모엣-헤네시와 루이비통을 분리함.
아르노가 LVMH 전체를 먹고자 할 것이라고는 상상을 못 했음.
이때 아르노는 디올 지분을 거의 다 팔고 그룹 지분을 각각 사고 각각의 최대주주가 됨.
그리고 지금까지 럭셔리 그룹을 진두지휘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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