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스웨거] 명품제국 LVMH & 제왕 베르나르 아르노 이야기

2022. 10. 27. 20:08부자에 대한 공부/투자 현인들의 인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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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sTCBvSLjFP4 

럭셔리 브랜드의 어벤저스.

시작은 루이비통과 모엣 헤네시가 만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지금은 이름만 들어도 어마어마한 브랜드들,

패션으로는 디올, 셀린느, 펜디, 리모와, 벨루티, 지방시,

로로피아나, 겐조, 마크 제이콥스.

시계, 보석으로는 최근 인수한 티파니 앤 코, 태그호이어,

불가리, 제니스, 위블로.

코스메틱은 겔랑, 프레쉬, 베네피트, 메이크업 포에버.

주류는 럭셔리의 상징인 돔 페리뇽, 헤네시, 모엣 앤 샹동.

이 브랜드를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대단한 것인데

무려 75개나 가지고 있습니다.

기업 가치는 500조 원.

유럽 기업 중 단연코 1위고 전 세계 모든 기업을 합쳐도

20위 안에 들고 있습니다.

어떻게 럭셔리 제국을 만들었을까요?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두 남자의 자취를 따라가야 합니다.

먼저 LVMH에서 가장 첫 글자 LV를 담당하고 있는

루이뷔통 창립자, 루이비통입니다.

1821년 프랑스 동부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14살에 아버지가 재혼을 하면서 집을 나왔습니다.

어린 나이에 집을 하면서 그가 목표로 한 곳은 파리입니다.

그런데 비행기나 기차는커녕 자동차도 없었죠.

그는 온갖 허드렛일로 입에 풀칠을 하며

파리를 향해 조금씩 조금씩 발자국을 내디뎌

2년 만에 파리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루이비통은 가장 유명했던 가방 장인 밑에 들어가 일을 합니다.

일을 배우면서 그가 한 일은 귀족들 짐을 싸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루이비통은 기술이 남달랐죠.

그가 패킹한 짐은 섬세하고 고급스러운 디테일이 남달라

귀족들 사이에서 최고의 포장 전문가로 소문이 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파리의 상류층이 이용할만한 여행용 고급 가방을

만들어야겠다는 꿈을 가지죠.

사실 이때는 여행을 한다는 것 자체가 곧 상류층이었습니다.

일반 사람은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평생 자신이

살았던 도시 이외에 아무 곳도 가보지 못한 사람이 대다수였죠.

이렇게 귀족 사이에서 짐을 잘 싼다는 소문이 난 루이비통은

나폴레옹 3세의 황후, 외제니의 전담 패커가 됩니다.

그렇게 짐 싸기를 17년, 16살에 파리에 도착한 그의 나이는

어느덧 30대 중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루이비통은 그간의 노력을 드디어 보상받습니다.

외제니 황후의 후원으로 자신의 매장을 냈죠.

17년 만에 이름을 걸고 낸 매장은 포장 전문 가게였습니다.

이미 귀족들 사이에는 최고의 전문가로 포지셔닝되어있었고

황후의 전속 패커였죠.

거기다가 포장 가게를 낸 시기를 프랑스가 경제적 호황을

누리던 시기였습니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났고 휴양지로

여행을 가는 사람들도 자연히 늘어났습니다.

이렇게 루이비통을 돈을 쓸어 담차오.

당시 만들어진 여행 가방은 목재로 만들어져서

무겁고 부러질 위험이 많은 데다가 관모 양으로 제작되어

위에 쌓아 올리기가 힘들었습니다.

루이비통은 독자적으로 이 점을 보완하여 개발합니다.

트렁크는 캔버스를 써서 가볍고 전체가 각진 사각형으로 되어있고

여러 개를 적재시키기도 간편했습니다.

거기에 프랑스 상류층들이 좋아할 만한 고급스러운 디자인

까지 갖추고 있었습니다.

귀족 포장 전문가가 만든 럭셔리 트렁크.

루이비통의 트렁크가 발매되자마자 후원자였던 황후 등

사회에서 저명한 사람들이 줄지어 구입해 또 인기를 얻습니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디자인이나 상표 등의 지적 재산권이라는

개념이 지금보다 모호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루이비통이 만든 트렁크가 인기를 끌자 많은 공방들이

비슷한 스타일의 모조품을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모조품이 제일 많았던 것이 바로 이 루이비통의

트렁크였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루이비통과 모조품의 관계는

떼려야 뗼 수 없는 관계였죠.

루이비통과 그의 아들인 조르주 비통은

모조품 때문에 많은 고민을 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하면 차이점을 한눈에 알려줄 수 있을까 고민한 결과

그들은 역사적인 다리에 문양을 개발했습니다.

바둑판 모양의 격자무늬 안에 자신들의 로고를 새긴

다리에는 많은 패션 하우스들이 자신의 브랜드를 알리기 위해

차별화를 두기 위해 만든 문양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이후 루이비통이 죽고 조르주 비통이 경영권을 물려받으면서

그는 루이비통을 확장하기 시작합니다.

먼저 그는 현재의 루이비통의 상징인 모노그램을 착안합니다.

모노그램은 지금까지 루이 비통의 상징적인 문양이 되었죠.

애매한 바둑판무늬에서 LV를 교차한 모노그램은 이제 다른 브랜드에서

아예 따라 할 수 없는 독창적인 그들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거기다 트렁크에만 한정되어있던 라인을 다양한 가방을 만들면서 확장해 나갔는데요.

지금 루이비통의 대표적인 키폴 백이나 스피디백 등은 모두 이때 만들어졌습니다.

특히 스피디백은 한때 길거리에서 3초에 한 번은 볼 수 있는

가방이라 하여 3초 백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후 1900년대 후반까지 루이비통은 대를 이어가며

계속 가족 경영을 이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1987년 루이비통은 당시 모엣 샹동&헤네시 그룹과

더 큰 기회를 모색하기 위해 합병을 하게 되는데요.

그리고 이때 프랑스 한쪽에서 이 뉴스를 접하며 조용히

웃음 짓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베르나르 아르노는 1949년 프랑스의 한 북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큰 건설회사를 운영해 남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자랐죠.

거기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엄청난 수재 소리를 들을 정도로

머리가 좋았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프레 파 과정을 거쳐 명문 에콜 폴리테크니크까지

흔히 말하는 프랑스 엘리트 코스를 밟은 그는

졸업 후 아버지의 건설 회사에 입사합니다.

그리고 그는 5년 만에 아버지에게 앞으로 회사의 미래는

부동산 사업에만 집중해야 한다고 설득해 나머지 사업을 정리 후

바로 다음 해 아버지의 뒤를 이어 회사 대표로 취임합니다.

아르노는 이후 더 큰 세상을 보아야겠다며 미국으로 떠나는데요.

그가 처음 미국에 도착하고 택시를 탔을 때 그에게 어디서 묻었다고 합니다.

아르노가 프랑스에 왔다고 하니 택시 기사는 프랑스 대통령의

이름은 모르지만 크리스천 디올은 안다고 했죠.

그는 이 대화에서 앞으로의 대화는 럭셔리 산업에 있다는 확신을 합니다.

그래서 그는 건설 사업과 부동산 사업으로 번 돈으로

프랑스 기업 부상을 인수합니다.

다양한 사업군을 가지고 있는 대기업이었지만 당시 경영 실패로

파산 위기 직전이었습니다.

하지만 부산이 가지고 있는 사업 중 하나가 디올이었죠.

아르노의 부삭 인수는 럭셔리 제국 건설이라는 큰 그림의 첫 붓터치였습니다.

그 후 대규모 구조조정을 통해 제 무재 표를 보기 좋게 만들었죠.

그리거 디올과 고급 백화점인 봉마르쉐를 제외하고 모든 사업부를 쪼개 매각합니다.

지금은 흔하게 볼 수 있지만 당시 유럽에서 이런 경우는 찾아볼 수 없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아르노는 현금으로 약 6,000억 원가량을 챙깁니다.

이때가 1980년대 후반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금액이었죠.

이렇게 총알을 확보한 그는 고급 정보를 입수하게 되는데요.

LVMH 그룹에 내부 분열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당시 루이뷔통, 모엣 샹동 앤 헤네시 3가지 회사가 힘을 합쳐 만든 회사죠.

서로의 약점은 보완하기 위해 합쳤지만 패션과 주류라는

다른 분야의 회사들이 합쳐있다 보니 조금씩 분열이 생기기 시작하는데요.

처음 마른 마음을 먹었던 것은 모엣 헤네시 쪽이었습니다.

그들은 또 다른 주류 회사인 기네스를 끌어들이면서 지배력을 늘리고자 했죠.

이렇게 주류 거대 기업끼리 담합을 하기로 한 것을 보고

루이뷔통 역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산의 인수와 구조조정으로 패션계뿐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던 아르노에게 도움을 요청하죠.

그리고 아르노는 전재산을 털어 LVMH의 지분을 사 들입니다.

루이비통이 한 숨 돌렸다고 생각한 차 통수를 맞게 됩니다.

아르노는 LVMH의 지분을 사면서 물 밑에서는 기네스와 만나며

자신의 영향력을 키워나간 것입니다.

결국 루이비통이 정신을 차렸을 때 아르노는 2년간 총 43.5%의 지분을 사들여

넘볼 수 없는 절대 주주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르노는 이때부터 LVMH를 명품 제국으로 만듭니다.

돈과 시간이 생길 때마다 모든 명품을 다 사들이기 시작하죠.

그는 많은 패션 브랜드들이 루이비통과 같이 내부에 조금씩

금이 가는 것을 알게 되면 균열을 더 크게 만든 다음 브랜드를 먹어버렸습니다.

그의 별명이 캐시미어를 입은 늑대가 된 것은 그냥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가 노린 명품 기업들은 잠시 틈을 보이면 아르노에게 목덜미를 물려나갔죠.

이런 아르노도 목덜미를 무는데 실패한 2 브랜드가 있으니

구찌와 에르메스입니다.

구찌를 인수전에서 케링 그룹에게 지고 에르메스는 유일하게

아르노의 공격에서 자신들을 지키게 된 브랜드가 되었죠.

케링 그룹 매출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구찌와 모든 럭셔리 브랜드에서도

가장 정점에 군림하는 에르메스.

만약 이 브랜드까지 LVMH에 속했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합니다.

한편에서는 그가 럭셔리 브랜드에 개입하게 되면서 예술성을

갖추어야 할 브랜드들이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변질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비즈니스 능력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이었죠.

일례로 루이뷔통 총책임자로 마크 제이콥스를 영입했을 때

사람들은 전통적인 루이비통의 색깔을 애들 장난처럼 만든다고

혹평을 했지만 결국 이례 없는 상업적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또 그는 넷플릭스가 막 사업을 꾸려나가던 시기인 1999년에 개인적인

투자를 했으며 전 세계에서는 월마트 다음으로 큰 체인인

까르푸의 지분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재 그의 재산은 약 240조 원으로 제프 베조스와 엎치락뒤치락하며

2~3위를 왔다 갔다 합니다.

빌 게이츠의 재산은 뛰어넘은 지 오래고요.

자녀들에게 아르노는 그냥 명품 기업 자체를 줘버립니다.

독일의 명품 캐리어 브랜드 리모와를 인수했을 때는 8,000억 원을

주고 인수한 후 당시 24살밖에 되지 않은 아들 알렉상드르

아르노에게 경영권을 깜짝 선물로 주었습니다.

이미 70이 넘은 나이지만 그는 여전히 더 큰 제국을 꿈꾸고 있습니다.

2019년 LVMH가 티파니 앤 코를 인수할 것이라는 뉴스가 터졌죠.

인수 금액은 19조 원.

그런데 2020년 코로나가 터지고 미국과 프랑스의

무역 분쟁이 심해지면서 LVMH의 사정이 어려워져서

인수를 못하겠다고 발표합니다.

하지만 이는 가격을 깎으려는 쇼로 보고 있었죠.

많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라도 한 듯 결국 17조 원에 인수 완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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