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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 김재원] 부동산이 명함이 되는 시대와 강남 불패 이유

NASH INVESTMENT 2022. 9. 8.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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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lTfuhXNG4SI 

Q. 내가 사는 곳이 나의 신분을 대변하는 현상?

이게 언제부터 시작되었냐고 물어보시면

아마 근대 도시가 만들어지는 시점부터

이런 현상들이 극단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전에도 당연히 있었죠.

신분에 따라 거주지가 달랐을 테니까요.

신분제가 없어졌음에도 각자 사는 지역이

어떤 특정 계층을 상징하게 되는 건 근대 이후에

만들어진 현상입니다.

저는 항상 주택 혹은 도시 혹은 서울에 대한 강의를 할 때

어디 사세요?라는 의미에 대해서

항상 질문을 하고 시작하는 편입니다.

어디 사세요?

저 강남 사는데요.

라고 말을 한다거나 한남동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리적으로 한강 남쪽에 살고 있습니다.

라고 이야기하기보다는 약간 몸에 힘 이주 어집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보면 주소지가 자신의 계층을

상징하기 때문에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저는 강남 삽니다.

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이제 특정한 계층이 그 동네에 모여 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발생을 하는 것이고

어떤 동네를 딱 떠올렸을 때 아 그 동네에는 그런

사람들이 살지! 하는 것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세상이 지금 우리 대한민국이지 않나.

그런데 이제 저는 그것이 궁금해진 겁니다.

어디 사는지가 왜 중요해졌을까?

분명히 이유가 있을 텐데 추적하는 과정에서

서울이 만들어지는 과정까지

이렇게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을 것입니다.

서울만큼 서로 간의 벽을 치고 있는 도시도 없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생각하게 됩니다.

휴거 : 휴먼시아 사는 거지.

엘사 : LH 아파트 사는 사람.

임대주택 사는 사람을 폄 하한가 거나 놀이터를 같이

못쓰게 한다든가 길도 나눈다든가 이런 기사를 볼 때마다

서울처럼 서로 간의 벽을 치고 사는 도시가

참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임대 주택문제뿐만 아니라 강남과 강북을

가르는 이런 문화 둘, 강 하나일 뿐인데

대한민국이 형성된 이후에 서울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조금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Q. 서울의 과거는?

한국 전쟁이 터진 다음에 서울이 다섯 번이나 주인이 바뀝니다.

처음에 이제 남한이 차지하고 있다가 북한이 한번 차지했다가

다시 인천 상륙 잔전 이후 남한이 수복했다가

중공군이 내려오면서 한번 빼앗겼다가 다시 수복하는 과정.

서울이 전쟁의 격전지였다는 말입니다.

거의 다 부서집니다.

거의 한 60% 가까이 집부터 시작해서 상하수도 뭐 할 것 없이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는 거죠.

식민지 시기의 유산이 그대로 넘어온 채로 아무것도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었던 서울에 사람들은

밀려들어왔고 그 가운데서 전쟁이 일어나서 폐허가 된 상황.

그것을 재건해야 하는 상황.

이런 상황인 것입니다.

도시를 계획하고 도시 안에 사람이 살게 하는데

돈이 굉장히 많이 드는데 전쟁 이후에는 돈이 없는 거죠.

거의 대부분의 돈은 미군의 원조물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죽 끓여 먹다시피 해야 할 정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울에 넘쳐나는데 이것을 관리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1953년 전쟁 끝난 이후 직후에 서울의 상황입니다.

그러면 그때 사람들은 어디에 살았냐?

이것이 가장 중요할 것인데 대부분 판자촌입니다.

거의 서울에 집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람을

통계로 내면 한 50%는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50%의 사람들이 어떤 집까지 포함하고 있냐면

고아원, 병원, 양로원.

이런 것까지 포함해서 50%인 거죠.

그 50%.

그러니까 사실 정상적인 주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20~30% 밖에 되지 않고 거의 대부분 한 70% 가까운

서울 시민들은 정말 무허가 주택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울시는 이것을 관리하거나 통제할 수 없었고

그러다 보니 지금 우리가 상상했을 때 무허가 주택이라고

생각하면 그려지는 판자촌들 있잖아요.

그거는 사실 거의 청계천이나 우이동이나 이런 천변에

판자촌들이 형성이 되어있는 것이고 사실 무허가 주택이라고

표현은 하지만 그게 실제로 양성화된 주택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냥 짓고 사는 것입니다.

양옥집을.

그런데 그 위치가 어디냐면 식민지 시대에 서울시에

만들어졌었던 공원용지라고 하는 시유지, 국유지, 공유지 자리에

그것들이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이냐면 태평양 전쟁이 나고 난 다음에

식민지 시기에 일제가 조선총독부죠.

조선총독부가 공원 용지를 엄청나게 많이 만듭니다.

공원이라고 하는 그런데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공원이 아니고

방공호입니다.

그러니까 방공호, 일본은 주택의 특성상 폭격을 맞아서

불이 나면 목조 건물이기 때문에 도시 중간중간을

뻥뻥 뚫어놓았습니다.

거기에 방공호를 짓는 거거든요.

불이 번지지 않게.

그 도시 계획을 경성에다가 지금의 서울 거기에다가 그대로 이식한 거죠.

목조 건물이 중심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요.

왜냐하면 이게 일제가 이제 그런 식으로 도시 정책을 펼쳤으니까

서울 중간중간에 포격에 대비한 방공호들이 많아요.

남산부터 주변에 있는 산들.

그리고 심지어 도시 한가운데에서도 그런

중간중간 뻥뻥 뚫려있는 공간들이 되게 많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거기가 시유지고 국유지고 공유지고 사유지인

경우도 있는데 여기가 관리가 안 되는 것입니다.

원래 있었던 집들을 부셔놓고 방공호라고 막 불렸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서울 사람들이 거기에다가 허가를 받지 않고

집을 짓고 살게 되었던 겁니다.

그것이 무허가 주택의 기원이 된 공간입니다.

Q. 현대 서울의 시작은?

1962년~1963년 시점에서부터 1966년이라는 시점이

굉장히 중요한 분기점으로 등장합니다.

1966년이라는 시점이 중요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첫 번째는 1차 경제개발계획이 완성되는 시점입니다.

마무리되는 시점.

그러다 보니까 경제개발계획의 성과가 조금 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965년에 한일 협정이 맺어지고 일본의 차관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돈이 조금 풀리기 시작하는 시점도

1966년이라는 시점이고요.

돈이 좀 도는데 도니까 한국에서 독특한 존재들을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그 존재가 중산층이라고 하는 존재입니다.

어떤 분들은 1966년 시점에서 중산층이라고

하는 것이 있기가 힘든데?

라고 이야기하시는 분들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이 시기에 처음으로 한국 사회에서 

중산층이 무엇일까?

라고 하는 고민을 하기 시작하고 실제로 정치권에서

내가 중산층, 우리 정당이야말로 중산층을 대변한다라고

하는 주장들을 하기 시작하는 시점도 1966년이라는 시점입니다.

흔히 이야기하는 중산층 논쟁이라고 하는 것도 벌어졌던 시점이죠.

그렇게 한국 사회에서 중산층이라고 하는 존재들에 대해서

궁금해하기 시작하는 시점이었습니다.

누가 중산층이지?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것이 있죠.

화이트칼라 노동자라든지 아니면 뭐 적어도

집 한 채 정도는 가질 수 있는 정도의 재력.

대학교 혹은 고등학교 이상의 학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오히려 이런 이미지들이 있습니다.

그 이미지들 속 존재들이 많이 살고 있던 

도시가 바로 서울이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평균 임금만 보더라도 다른 대도시와 비교했을 때

2배 이상이 차이가 났고요.

거기에 당연히 대학이 거의 서울에 몰려 있다 보니까

고등학교 이상 혹은 대학까지 나온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의 수도 다른 도시들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높은 곳이 서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서울을 어떤 도로 만들까?

서울 도시 계획, 공간을 어떻게 만들까라고 했을 때

그 존재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던 겁니다.

그래서 1966년 시점에 서울시장으로 부임하는 김현욱이라는

처음으로 국회에서 이제 서울을 이렇게 만들 겁니다라고 하는

시정 연설을 하게 되는데 처음 등장했었던 말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앞으로 서울 시민은 중산층과 영세 시민으로 나누어서

도시계획을 하겠습니다라고 했던 시정연설이었죠.

서울이라는 공간이 중산층을 중심으로

새롭게 리빌딩될 것이 라다는 것을 국회의원뿐만 아니라

국민들에게 선언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게 리모델링된다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여기서 김현옥 서울시장이라는 사람을 

잠깐 설명드려야 할 텐데 원래 부산 시장을 하던 사람입니다.

당연히 그전에는 군인이었고요.

불도저 시장으로 유명했던 사람이었죠.

이때 그런 별명이 많긴 했지만 대표적이었습니다.

부산 시장 때 왜 그런 별명이 붙었냐면 피난민들이

몰리고 그러다 보니까 무허가 판자촌이 즐비하고

기존의 도시 계획이 무용지물이 될 정도로

무허가 주택들이 전 도시를 뒤엎는 그런 식의

도시가 형성되었던 것이 1950년~1960년대 초반 모습이었는데

그 무허가 주택을 불도저로 밀어버립니다.

그리고 새롭게 건물을 올리는 형식으로 부산을 개발했었죠.

그 서울시장이 서울시에서 한 것은

여의도를 만들었고 강남 개발을 했고 강변 북로를 뚫었고

지금 서울 시내 대부분의 고가도로를 만들었습니다.

터널도 거의 뚫었죠.

지금 서울 시내에 있는 기본적인 도로를 깐 사람입니다.

서울 시내 여전히 남아있는 시민 아파트를 지은 사람도 이 사람이고요.

김현옥 서울 시장이 한 10년 정도 재임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딱 4년 재임했습니다.

4년 동안 한 일이었죠.

어마어마하게 서울시를 새롭게 만든 사람입니다.

1966년부터 1970년부터 닦은 터, 길 그대로가

서울시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정도로 완전히 뒤바꾸었죠.

Q. 서울 아파트가 탄생은?

아파트의 탄생은 어디냐라고 하면 마포 아파트부터

시작이 되는 거니까 1962년.

탄생부터 그렇다고 하기에는 조금 그렇지만

강남이라고 하는 동네 지금 우리가

흔히 부촌이라고 불리는 신부촌이라고 불리는 동네들.

동부이촌동이 이제 한 1966년 시점부터 개발되기 시작하고

1970년이라는 하는 시점에 여의도 시범아파트를 시작해서

만들어지는 거고 똑같이 1960년 후반 1970년 초반부터

반포 아파트가 만들어지면서 강남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시점에 만들어지는 이 부도심 지역의 아파트촌.

그때부터는 단순히 이 공간이 주거의 공간만이 있는

곳은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19768, 69, 70년이 넘어가는 시점에

이 공간들의 땅값이 뛰는 속도들을 보면 여기는

더 이상 거주는 아닙니다.

1년 만에 100배 이상이 뜁니다.

그런 공간도 있고 200~300배씩 뛰는 곳도 있고

하루에 2배씩 뛰는 곳도 있어요.

그런 거죠.

A 부동산에서 내가 이 땅을 샀다가 그 옆에 있는

B 부동산에 100 원주고 사서 A부동산에서 이곳을

100원에 사서 그냥 바로 옆 부동산 가서 110원에 파는 겁니다.

그리고 110원에 산 사람은 C 부동산에 150원에 팔고요.

그리고 그 옆의 D 부동산에 200원에 주고 팔죠.

이런 식으로 말도 안 되는 투기붐이 일어나는 시점도 

이런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부동산 시장을 억누르기 위해서

국가가 조금씩 조금씩 부동산 가격에

태클을 걸기 시작하는 시점도 이 시점입니다.

Q. 강남의 시작은?

서우 링 생각보다 북한이랑 가깝습니다.

파주랑 판문점 1시간이면 갑니다.

그런 것 때문에 북쪽으로 올라갈 확장은 없었죠.

그러다 보니까 서쪽이냐 동쪽이냐 남쪽이냐 중에

골라야 했었던 상황에서 안보에 대한 생각.

미사일 사정거리 계산했다고 한 사람도 있고요.

최대한 빨리 서울 시민들이 강을 건너지 않고

전쟁이 갔을 때 피난해야 하는 상황 까리 염두에 두었을 수도 있고요.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했을 때 한강 이남이 주목을 받았고

사실 결정적으로는 땅값이 쌌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농촌이었고 아까 말했던 부천이나 이쪽 지역에 비해서

개발을 할 때 저렴하게 개발할 수 있는 땅을 찾아야 했었던

이유도 한몫을 했고요.

그래서 강남이라고 하는 곳이 주목을 받게 되었죠.

https://www.youtube.com/watch?v=PsO9T0zIfYA 

Q. 강남이 특별한 이유는?

방금 제가 말씀드렸었던 것처럼 강남이

100배가 올랐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100배가 올라봐야 3~4천 원입니다.

100배로 올라서요.

그럼 그때 다른 땅들은 어땠냐?

이미 수십만 원 하는 땅도 있었고 강북은

평당 평균적으로 부도심 지역은 몇만 원대였죠.

그러니까 60~70년대 초반까지 강남 땅값은

올라봐야 몇천 원 여전히 쌌습니다.

왜 그러냐?

계속적으로 시그널을 주었습니다.

개발시킬 것이다.

일단 반포 아파트가 크게 성공을 하기도 했었고

그 이후에 그 위에 현대부터 시작해서 대림이니

이런 기업들 건설 기업들이 원래는 토목회사 수준이었는데

여기에 아파트를 지으면서 건설 기업으로 성장했죠.

그런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70년대 초반에 투자를 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투자하냐?

주택은행에서 기업이 돈을 빌리고 그 돈으로

강남이 개발되는 그 메커니즘이 이때 만들어졌는데

그래도 쌌죠.

부촌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로 부도심 지역으로 중산층들을 몰아넣고

살게 하는 그런 목적을 달성해야 하기 때문에

국가에서 강남땅을 펌핑하기 시작합니다.

강북 개발 억제를 법적으로 규정해버립니다.

시장 설립이 안되고 재건축이 안되고

유흥업소 신설이 안되고 기업들에게 강남으로 이전할 시

특혜를 엄청나게 주기로 약속을 합니다.

면세.

사실 이거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판교도 똑같은 메커니즘이죠.

세종시도요.

일단 기업들에게 특혜를 줘야 옮깁니다.

기업이 가야 노동자들이 이동하고 그러다 보니

기업 본사들을 강남으로 옮기라고 특혜를 주는데

안 갑니다.

왜?

버스 타고 출퇴근하고 말지 강남으로 살러 안옵니다.

70년대 초반까지는.

상하수도도 안 깔려있고 버스도 한남대교도 막 지어져서

다리가 하나 있는 것입니다.

강남으로 오려면 한남대고, 그 전이 제3한강대교죠.

1,2는 동떨어져 있었죠.

강남으로 가려면 한남대교를 타거나 다른 다리를 타고

한참 들어와야 하는데 누가 강남에 이사올까요?

그래서 국가에서 시작하는 것이 국가기관을 옮기기 시작합니다.

끊임없이 선전하죠.

지금 서초동에 있는 사법부 시절을 그쪽에다

몰아넣기 시작하는 것도 이 시점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국가 입장에서는 특혜는 다 주는 거이었습니다.

기업들한테 특혜 주겠습니다.

강북 억제하겠습니다.

이런 것들.

그래서 지금 어떻게 보면은 강남이 이때 만들어지기 시작하고

땅값이 오르고 여기에 들어왔었던 중산층들이

특혜를 입는 속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건

강북 주민들이 피해를 봤다는 것입니다.

그 희생 덕분에 70~80년대 강남 개발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안 가요.

그래서 이 시기까지 1970년대 중반에서 후반까지

강남은 유흥가 이미지였습니다.

아까 유흥 시설을 금지시켰죠, 강북에 그다음에

기업 본사들이 강남에 왔습니다, 특혜를 받고.

비즈니스맨들이 유흥하는 곳이었습니다.

방배동, 서초동 별명이 제2의 무교동이라고 불렸죠.

과거에 무교동은 각종 유흥시설이 있었습니다.

거기 있었던 유흥시설들이 방배, 서초로 갔죠.

그래서 유흥가라는 이미지가 많았습니다.

비즈니스맨드링 술 먹는 곳.

이곳을 갑자기 '부촌'으로 뒤바꾸는 사건이 벌어지게 되는데

그게 이른바 '8 학군'이 옮겨가게 됩니다.

* 강남교육지원청의 관할지역인 강남구와 서초구.

거의 반협박으로 원래 종로 인근에 있었던

명문고 거의 대부분이 강남으로 옮겨가는 시점이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중반까지의 상황인 겁니다.

휘문고, 숙명여고 등 학교가 다 이 시점이 되었을 때

강남으로 옮겨가게 되는데 중요한 것은 이때 이미

서울은 고등학교가 뺑뺑이입니다.

주소지에 따라서 뺑뻉이로 가는 것으로 바뀌었죠.

명문고를 가기 위해서는 강남으로 이사 가야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른바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강남으로

집을 옮기게 되는 것이고 그걸 잘 표현한 영화가

< 말죽거리 잔혹사 >입니다.

그 시대 강남을 그리고 있는 영화거든요.

그러면서 강남의 이미지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합니다.

유흥가라고 하는 곳에서 명문고가 있고

그 명문고를 따라 중산층이 사는 곳.

거기에 그러다 보니까 집값도 급박하게 오르게 되고

처음으로 강남이라고 하는 곳을 부유층이 사는 곳.

부유층의 공간이라고 표현하는 언론 기사가

나오는 시점이 1982~83년 시점입니다.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

이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졌죠.

가격만 놓고 보았을 때는 크게 차이가 나진 않아요.

그렇게 막 엄청난 차이는 아니죠.

강북 쪽에 있었던 부도심 지역에 비해서 조금 비싼

정도였지 지금처럼 압도적으로 차이나는 공간은 아니었습니다.

1980년대가 되면 강남 사람들이 특유의 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합니다.

이른바 강남 문화라는 것을 만들어내기 시작하는데

중요한 맥락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중산층이라고 하면 학력은 어느 정도 갖추었죠.

학교가 여기는 명문고 위주로 형성되니 환경을 어느정도

갖추었고 집이 있고 그런데 집 가격이 어느정도 가가고

세상이 이제 어느정도 불은 거죠.

부동산이라고 하는 것을 기반으로 재산도 불었고

학력도 어느정도 갖추었는데 원래 그 중산층.

혹은 부유층이라고 하는 건 하나 더 따라가야 합니다.

그게 문화 수준입니다.

그러다 보니 상류층들의 문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하고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화랑, 미술관 이런 것들이

조금씩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여성들 같은 경우에는 남편이 이때

당시 맞벌이가 흔한 시절은 아니었으니까 나가서 일할 때

강남 부인들은 화랑에 모여서 커피 마시면서 그림을 보거나

이런 문화들을 조금씩 형성해나가는 것이 80년대 후반이었습니다.

그러면 회사 나가서 일하고 있는 남편들은

어떤 문화를 형성하냐?

골프 치고 호텔에서 밥 먹고 뭐 이런 겁니다.

그때 막 한 끼에 만원 이런 호텔에 가서 먹는 게

막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거죠.

그렇게 일정 정도 상류층이 하는 문화를

답습해나가면서 학력, 부동산 자산, 경제력, 문화적인 수준까지

어느 정도 가남에 사는 사람들이 그들 특유의 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또 80년대 중반이 되면 굉장히 흥미로운 일이 벌어지는데

그것이 이른바 3저 호황이라고 하는 

한국사에서 전무후무한 경제성장이 이 시기에 일어납니다.

저달러, 저유가, 저금리.

한국 사회에 이때 처음으로 소비문화라고 하는 것이 만들어집니다.

그전까지는 사실 소비문화라고 불릴 무엇인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처음으로 한국사회에도 자연스럽게

소비를 할 수 있는 문화들이 형성된 것입니다.

학력, 돈 등 다 갖춘 사람들이 스스로의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곳.

그런 이미지를 만들기 시작하는 것이 1980년대 시점입니다.

그때부터 사실 집값은 이제 80년대 후반이 되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가격이 상승했고 이곳에

살리기 위한 조건들이 하나씩 하나씩 더 붙게 됩니다.

Q. 유주택자와 무주택자의 자산 불평등, 생각은?

저는 지금 부동산 하나 가지고 있는 다주택자 말고

서울에 집 한 채 가지고 있는 것이 스스로의 자긍심이자

이게 본인 자산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사람을

쉽게 비난하고 욕할 수 있을까?

저들의 집값이 떨어지는 것에 대해 우려하는 저 마음을

우리가 과연 그걸 단순히 욕심쟁이라고 비판할 수 있을까?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국가에 부를 불리라고 종용해왔고 그 시스템에

충실하게 따랐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시스템을 무너뜨릴 테니까

너희들도 따라라고 한다?

일단 방향성에 대해서 옳은 가 물어봐야 하고

두 번째는 그렇게 되는 순간 중산층의 많은 부분이

무너지게 되겠죠.

그게 쉽지 않은 일일 테고 사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표입니다.

그들이 표이기 때문에 그 어떤 정치인도 누구도 쉽게

중산층 중심의 1인 1 주택 1가구 1 주택을 소유하고 있는

지금의 이 분위기 그걸 깨는 정책을 하는 사람이

그런 정신이 나올까?

저는 모르겠습니다.

연착륙시키는 방법을 생각해야겠죠, 결국엔.

지금의 이런 말도 안 되는 집값 상승 문제가 될 수밖에 없으니

연착륙시키는 과정에서 근본적인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 메커니즘을 뜯어고쳐야 하는 부분도 있을 테고

그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거시적인 맥락과

조금 더 긴 호흡이 필요하겠죠.

Q. 앞으로 집값 전망은?

저는 역사학 자지 부동산 전문가는 아니어서

과거의 기초에 흐름밖에 없죠.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런 것은 명확합니다.

집값이 다이내믹하게 떨어졌던 적은 없습니다.

특히 서울 집값은 물론 일시적으로 하락했었던

국면 국면이 있습니다.

다들 아시는 것처럼 국가에서 정부에서

특정 정권에서 부동산 시장을 강하게 억제.

부동산 실명제를 갑자기 한다거나 아니면 그 전으로

따지면은 그냥 뭐 부동산 투기 억제 정책을 펼치는

시점들이 있죠, 그때 정체되긴 합니다.

그리고 외환위기 때 실제로 거의 한

40~50% 정도 가까이 하락세를 보이거든요.

2008년에도 30~40%의 하락세를 보이거든요.

서울 집값은 그런 특정 국면에서 한 번씩 뚝 떨어졌다가 계속 오릅니다.

Q. 글로벌 도시와 서울의 차이점은?

공간의 특수성입니다.

이거는 꼭 저희가 생각을 해야 합니다.

프랑스의 파리, 영국의 런던, 미국의 뉴욕.

일본의 동경, 이런 나라들과 서울이 각 나라들에서

방금 이야기했던 그 도시들이 갖는 위상과

대한민국에서 서울이 갖는 위상이 같냐?

저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산업의 방향성.

앞으로 대한민국이 이러한 산업을 성장시키겠다고 하면

떠오르는 여러 산업들이 있죠.

IT, 플랫폼 등 젊은 사람들이 거기 취업할 것입니다.

어디 있죠 그 회사들이?

판교에 있습니다.

서울 바로 밑.

분당 판교 강남에 몰려있어요.

그들이 지역을 옮길 생각을 하겠나요?

이제 막 왔습니다.

안 옮길 겁니다.

그럼 그 젊은 노동력을 끌어당길 수 있는

고급 인재들이 있는 대학은 어디 있죠?

서울에 있습니다.

제가 지금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 보니까 저는

강사지만 사이에서 유행하는 말이 있습니다.

벚꽃 피는 순서대로 대학이 망한다.

지방 대학들이 앞으로 점점 소멸할 거거든요.

소멸하고 있고요.

흔히 이야기하는 지방 거점 국립대학들도 지원율이

예전에 비해서 반토막 이상은 난 이런 상황들.

학령인구는 더더욱 줄어드는.

이런 것이 쭈욱 따라오게 되면 남아 있는 대학은

서울에 있는 대학뿐이겠죠.

취업하기 이전부터 서울에 몰려있겠죠.

직장이 서울에 있기도 하죠.

그 직장에서 생활하기 위해 은행에서 말도

안 되는 돈을 빌려서 집을 사야 하는 상황.

이거를 대승적인 합의를 거쳐서 떨어뜨리자고요?

그거를 받아들일까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추세 속에 존재하는 서울이라는 공간의

특수성이 있기 때문에 다른 데에 비해서 집값 가격

상승률이 높으니까 이런 이야기는 무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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