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2. 1. 15:16ㆍ부자에 대한 공부/투자 현인들의 인사이트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한국에서 실제로 벌어진 '황금광시대'의 실화에 대한 북언더스탠딩 영상에서는, 금광을 발견해 일확천금을 거머쥔 대표 인물 최창학의 삶과 당시 사회 분위기를 집중적으로 다룹니다. [1]
## '황금광시대' 소개
- 이 책은 국문학자 전봉관 교수가 1930년대 경성(서울) 및 당시 자료들을 바탕으로 집필한 논픽션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실제로 금광을 캐어 부자가 된 이들의 사실적 이야기를 다룹니다. [1]
- 책 제목의 '황금광(黃金狂)'은 '금에 미친 시대'라는 뜻으로, 서구의 골드러시(캘리포이나 골드러시 1850년 전후, 1849년 절정 : 포티나이너)가 아닌 조선의 진짜 금광 열풍을 가리킵니다. [1]
## 조선의 금광 열풍과 사회상
- 일제강점기 1930년대 한국에서는 캘리포니아식 골드러시와 비슷하게 너도나도 산을 파며 금을 찾는 열기가 엄청났으며, 사회 각계각층(여성·지식인·의사·변호사 등)이 금을 캐러 몰렸습니다. [1]
- 금맥을 찾으면 막대한 부를 얻는 사례가 다수 나오며, 실제로 300억 원대 부를 이룬 여성도 있었다는 신문 인터뷰까지 발굴되어 책에 수록됩니다. [1]
- 운산금광(노다지 유래) 등 동아시아 최대 규모 금광이 조선에 있었고, 미국계 기업의 진출과 함께 대규모 채굴이 이뤄졌습니다. [1]
## 최창학의 성공 스토리
- 최창학은 평안북도 출신의 가난한 청년으로, 곡괭이 하나로 20대 후반부터 산을 파기 시작해 5년간 실패와 고생 끝에 '삼성금광'이라는 대형 금맥을 발견합니다. [1]
- 이 금광의 연간 생산량은 현재가치 7천억 원에 달했으며, 1년에 순수익 2천억 원에 달할 만큼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1]
- 그는 일꾼을 고용해 직접 채굴하거나, 광산 일부를 임대해 랜덤박스처럼 광맥 채굴권을 팔아 프랜차이즈 사업처럼 돈을 벌었습니다. [1]
- 마지막에는 금광 전체를 일본 재벌(미쓰비시 등)에 매각해 3천억 원 상당의 현금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며, 1930년대 경성 최대의 저택(경교장)을 짓고 조선 3대 부자(민영휘, 김성수 다음) 반열에 오릅니다. [1]
## 사회 영향과 부의 확장 구조
- 당시 3대 부자는 '토지왕' 민영휘(외척), '산업자본가' 김성수, 그리고 금광왕 최창학으로 구분되며, 이 중 최창학은 스타트업형 신흥부자로 엄청난 인기와 상징성을 가집니다. [1]
- 최창학은 임대사업(광산 임대), 광산 매각(엑시트), 현금 자산 운용 등 투자·트레이딩적 마인드까지 보여주며 ‘조선판 대기업 창업자’ 역할을 합니다. [1]
- 양도소득세·세제 문제 등 당시 법제도의 허점을 활용해 부를 효과적으로 확장했다는 경제적 시각이 나옵니다. [1]
## 문화적·문학적 의미
- 금광 열풍을 배경으로 한 다양한 소설(채만식 ‘금의 정열’, 김유정 ‘금 따는 콩밭’ 등)이 등장하고, 당시 사회 분위기와 대박에 대한 집단적 열망이 문학과 신문 보도에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1]
- 최창학의 성공 이후 엄청난 인기가 이어지지만, 이후 인생의 굴곡과 후반부 이야기는 별도의 2부에서 다뤄집니다. [1]
이 영상은 조선의 실질적 골드러시와 그 중심인물의 스타트업형 성공담을 통해, 1930년대 한국의 자본·사회·문화적 풍경을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1]
출처
[1] (1부) 조선의 황금왕 최창학을 아십니까 | 북언더스탠딩 | 황금광시대 | 남궁민 북칼럼니스트 https://www.youtube.com/watch?v=6DU5nQVEGEg
일제강점기 1930년대 조선에 불었던 금광 열풍과 그 배경, 그리고 최창학의 후반 인생사를 다룬 북언더스탠딩 영상에서는 금광 부자들의 흥망성쇠와 당시 사회·정치적 상황이 주로 해설됩니다. [1]
## 금광 열풍 배경과 경제 상황
- 1930년대 조선은 일본의 경기 침체(1920년대 내내 금융 불안정과 대규모 지진(1923년 관동 대지진))와 대공황 여파로 경제가 어려웠고, 일본 정부는 화폐 긴축과 근본위제(금태환제도, 유동성 축소, 국제금융 국가로의 신용 회복, 부실 기업 도태로 경제 건정성과 효율성 확보)를 시행하면서 금값이 출렁였습니다. [1]
- 금은 돈의 유일한 대안으로 떠올라 금광 산업에 대규모 보조금과 정책 지원이 집중됐고, 국민들은 금광 채굴에 열광해 금이 미래의 생존 수단으로 여겨졌습니다. [1]
- 금광 생산량은 늘었고, 금광 자원이 적지 않았던 조선에선 전국적으로 금광 사업이 활발히 일어났으며, 산지별로 폐금광에서부터 신규 금맥 발굴까지 금광 부흥이 지속되었습니다. [1]
## 최창학의 말년과 위기
- 최창학은 1930년대 말까지 67개의 금광을 소유했고, 대규모 자산을 일제강점기 말기, 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보유했으나 광산 대부분이 북한 지역에 위치해 분단 후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1]
- 해방 후 정치적 혼란과 분단, 그리고 이승만 정부의 친일 숙청 정책 등으로 친일파로 분류돼 재산 압박과 세무조사, 탄압을 받으며 재산 대부분을 잃고 인생 말년에는 고리대금업에 손대기도 했습니다. [1]
- 최창학은 경교장을 김구에게 헌납해 임시정부 요인들의 거처로 제공했으나 이후 정치적 라이벌 구도 속에 재산과 권력을 잃고 결국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합니다. [1]
## 금광 산업과 사회적 영향
- 금광 산업에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각계각층이 참여했으며, 독립운동가, 여성운동가, 노동조합 위원장 등 다양한 사회 인사들도 금광 사업에 관여하는 복합적인 양상이 나타났습니다. [1]
- 당시 정부 정책과 국제 경제 상황(근본위제 시행·폐지, 대공황, 일본 국내 정치)과 맞물려 금광 산업은 거시경제적 변동성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1]
## 문화적·역사적 의미
- 금광 집산지에서는 금광 관련 투기와 버블 현상이 있었으며, 이들은 당시 사회를 움직이는 중요한 경제적 동인이었습니다. [1]
- 영상 진행자는 금광 열풍이 단순히 일제강점기 특정 지역 사건이 아니며, 남한과 북한 모두에서 이어진 역사적 사실임을 개인 가족사를 통해도 증언합니다. [1]
이 영상은 조선의 금광 열풍이 단순한 경제 현상을 넘어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미친 영향과 함께 주인공 최창학의 성공과 몰락을 통해 당시 시대 상황을 심층적으로 보여줍니다. [1]
출처
[1] (2부) 일제강점기, 조선에 금광 열풍이 불 수밖에 없던 이유 | 북언더스탠딩 | 황금광시대 | 남궁민 북칼럼니스트 https://www.youtube.com/watch?v=EeJ2BVxPs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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